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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1>11장. 언어, 혼동, 방해</h1>
<p>4장에서 나는 프랑스의 베노이트 만델브로트(Benoit Mandelbrot, 역자주: 1924~2010. 폴란드 출신의 수학자. 프랙탈 이론의 선구자.) 박사와 하버드의 야콥슨 교수가 언어의 다양한 현상에 관해 수행한 최근의 매우 흥미로운 연구들을 언급한바 있는데, 그중에서 단어의 길이에 대한 최적의 분포에 대한 논의를 언급했다. 이 장에서는 그 내용을 자세히 얘기하기 보다는 이 두 작가들이 만들었던 특정한 철학적 가정들에 따라오는 결과를 좀더 발전시켜 보고자 한다.</p>
<p>그들은 의사소통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협력하에 진행하는 일종의 게임으로 간주했는데, 일상적인 의사소통 상의 어려움과 의사소통을 교란시키려하는 가상의 개인들로 대표되는 혼동의 세력과 맞서는 게임이다. 글자 그대로, 여기서 연관되는 폰 노이만의 게임이론은 서로에게 메시지를 건네려 노력하는 한 팀과 그 메시지를 방해하기 위해 온갖 책략을 사용할 다른 팀을 다룬다. 폰 노이만의 게임이론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이게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즉,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방해자들이 최선의 전략을 사용한다는 가정하에 서로 협력하고, 방해자들 또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현재까지 최선의 전략을 써왔다는 가정하에 이들을 방해한다.</p>
<p>더 일상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대화를 나누는 팀과 방해를 하는 세력 양쪽 모두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블러핑 기술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일반적으로 이 기술은 상대방이 이쪽의 전략에 대한 확고한 지식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된다. 양쪽 모두 블러핑할 것인데, 방해하는 세력은 통신하는 세력이 개발한 새로운 통신 기법에 적응하기 위해, 그리고 통신하는 세력은 방해하는 세력이 이미 개발한 어떤 전략도 앞서기 위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내가 앞서 인용한바 있는, 과학적 방법에 대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신은 알기 어려울 수는 있지만 단순히 비열하지는 않다" (“God may be subtle, but he isn’t plain mean.”)</p>
<p>전혀 클리셰가 아닌 것이, 이것은 과학자들의 문제에 대한 매우 심오한 표현이다. 자연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정교한 기법이 필요하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기대할수 있는데 무생물의 자연에 관한한 우리가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때 자연이 우리를 혼동스럽게 하고 좌절시키기 위해 일부러 정책을 바꾸는 역습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진술은 생명체가 관련되는 경우에는 한계를 가지게 되는데, 종종 청중들을 히스테리에 빠뜨리는 일이 일어나며 많은 경우는 무의식적으로 진행되지만 그 청중들을 속이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진행된다. 한편, 우리가 세균 감염을 거의 정복했다고 여겨지는 순간에 세균은 돌연변이를 하고, 마치 우리를 시작했던 원점으로 다시 보내려는 고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개발한 것과 같은 특성을 보여준다.</p>
<p>자연의 이와같은 굴곡이 생명 과학의 전문가들을 얼마나 성가지게 했을지 몰라도 다행히 물리학자들이 숙고해야 하는 어려움들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자연은 정직하게 경기한다. 만약 한쪽 범위의 산들을 등반한 다음에 물리학자들의 뒤에 있는 지평선 위로 다른 하나의 산을 보게 되더라도, 이것은 그가 했던 노력을 좌절시키기 위해 일부러 거기에 놓여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p>
<p>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자연의 의식적이거나 목적을 가진 방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과학자들의 정책은 안전을 추구해야하고 혹시라도 악의적이고 기만적인 자연이 그가 최선의 정보를 얻고 전달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항상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은 정당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은, 그리고 특히 과학적 연구는 비록 그것이 유용한 노력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양의 노력을 필요로 하며, 거기에 있지도 않은 신기루와 싸우는건 절약해야 할 노력을 낭비하는 것이다. 우리의 통신 생활 혹은 과학적 생활이 유령과 복싱연습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과거의 경험은 우리에게 충분한 확신을 주는데, 자연이 해석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해석에 능동적으로 저항한다는 사상은 적어도 과거의 연구들에 따르면 정당화된 적이 없다. 따라서 유능한 과학자가 되려는 사람은 순진해야만 하고, 심지어 순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그가 정직한 신을 다루고 있다고 가정해야 하고 세상에 대해 정직하게 질문해야 한다.</p>
<p>이처럼 과학자의 순진함은 직업적인 적응의 산물이지 직업적인 결함이 아니다. 과학을 수사기관의 형사와 같은 관점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자신의 시간 대부분을 그에게 사용될 일이 결코 없는 속임수를 무력화시키는데 사용하거나, 직접 물어보면 기꺼이 답을 해줄 용의자를 추적하는데 사용하거나, 그리고 보통은 최근에 공식적인(official) 과학과 군사적인 과학의 영역에서 유행하는 도둑잡기 게임을 하는데 사용한다. 나는 현재 과학 당국의 책임자들이 가지고 있는 수사관적인 태도가 현재의 수많은 과학적 연구가 성과가 없게된 주된 이유라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다.</p>
<p>수사관 외에 유능한 과학자가 되기에 부적절한 다른 직업은 거의 삼단논법에 의해 따라 나오는데, 그는 자연이 부정직하다고 의심하고,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자연에 질문하는 태도에 있어서 부정직하다. 군인은 삶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투쟁이라고 훈련받지만, 호전적인 종교집단의 소속원만큼 이 관점에 묶여있지는 않다. 십자군이나 망치와 낫(역자주: 소련 국기의 상징)의 병사 말이다. 여기서는 근본적인 선전가(propagandist)의 관점의 존재가 선전(propaganda)의 특정한 성격보다 중요하다. 그가 자신의 믿음을 자신의 자유 및 직업적인 순진함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충성을 맹세한 군대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역자주: 1491~1556. 예수회의 창시자. 반종교개혁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함)의 것인지 레닌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충성이 절대적인 한에는 그가 어떤 맹세를 했는지와 상관없이 그는 과학의 고공비행에 적합하지 않다. 좌우 상관없이 거의 모든 지배 세력이 과학자들에게 마음의 개방성 보다는 순응을 요구하는 현 시대에 과학이 지금까지 얼마나 어려움을 겪어왔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한 악화와 좌절을 겪을 것인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p>
<p>과학자가 맞서 싸우고 있는 악마는 혼동의 악마이지 의도적인 악의를 가진 악마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자연이 엔트로피적 경향을 보인다는 관점은 마니교적인게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적이다. 자연이 과학자를 무찌르기 위해 노력하거나 공격적인 정책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의 악행은 그 본성상의 약함의 결과때문이지 그것이 가진 명확하게 악한 힘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약함은 우주 질서의 원칙과 같거나 혹은 열등한 것이지만 여전히 종교적인 사람들이 신이라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주의에서 세상의 어둠은 밝음의 반대이고 단순히 밝음의 부재를 뜻하는 반면에, 마니교에서는 밝음과 어둠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적대적인 진영에 속한다. 십자군, 지하드(역자주: 이슬람 성전),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악마에 대항하는 공산주의 전쟁은 모두 미묘한 감정적 마니교가 내재되어 있다.</p>
<p>아우구스투스적인 입장은 항상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경미한 동요 아래서 은밀한 마니교로 분해되기 쉽다. 아우구스투스주의의 감정적인 어려움은 밀턴의 <strong>실낙원</strong>에 나타난다. 만약 악마가 단순히 신의 피조물이고 전지전능한 신의 세상에 속해있으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구석을 가리키는 역할을 할 뿐이라면, 추락한 천사들과 신의 군대 사이에 벌어지는 대단한 전투는 프로레슬링 경기만큼이나 흥미로와진다. 밀턴의 시가 거짓된 신음소리를 내는 레슬링 쇼보다 위엄을 가지려면 악마에게도 승리할 기회가 주어져야만 하며, 비록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적어도 악마가 생각하기엔 기회가 있어야 한다. 실낙원에서 악마는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와, 그와 싸워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적어도 감정적으로는 그가 이 싸움을 그의 주인과 그 자신의 권리에 대해 주장하는, 완전히 쓸모없지만은 않은 필사적인 싸움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아우구스투스적인 악마도 조심하지 않으면 마니교로 전향될 것이다.</p>
<p>군대식 모델에 기초한 종교집단은 어느것이나 이와 유사한 마니교적 이단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종료집단은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적어도 상상으로는 전쟁에서 이겨서 스스로 지배세력이 될수 있다고 믿는 독립군과 닮은 꼴로 길러졌다. 이런 이유로, 그러한 종파나 조직은 본질적으로 과학자 내면에 아우구스투스적인 태도를 키우는데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그런 조직은 가치의 척도중에서 투명한 지적인 정직성을 높이 평가하려 하지 않는다. 속임수를 부리는 교활한 적들에 맞서기 위해 군사적인 술수가 허용된다. 따라서 종교적인 군사집단은 항상 복종, 충성의 맹세, 그리고 과학자를 방해하는 온갖 제한적인 영향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게 되어 있다.</p>
<p>교회 자신 외에는 누구도 교회를 대변할 수 없다는 말은 진실이다. 하지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교회의 조직과 주장에 대해 자신의 고유한 태도를 가질 수 있으며, 심지어 가져야만 한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하나의 지적인 세력으로서의 공산주의(communism)는 본질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바 대로이지만, 그들의 성명은 특정한 조직이나 활동으로 우리가 따라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침이라기 보다는 이상(ideal)을 정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주장들일 뿐이라는 것 또한 진실이다.</p>
<p>마르크스 자신의 관점은 아우구스투스적인 것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에게 악이란 선과 맞서 싸우는 자율적인 세력이라기 보다는 완전함의 결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는 전투와 대립의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며, 악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투스적인 태도가 적합한 헤겔의 정반합을 미래로 좌천시키려는 일반적인 경향이 있어 보이는데, 그 미래는 무한히 멀리 있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는 매우 약한 연관성을 가지는 것이다.</p>
<p>따라서 현재로선, 그리고 실질적인 행동의 문제에 있어서는 공산주의 진영과 교회의 다양한 진영 양쪽은 명확하게 마니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나는 마니교가 과학에 있어서 나쁜 분위기라고 암시해왔다. 이상해보일 수 있지만, 그 이유는 그것이 믿음에 있어서 나쁜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목격하는 특정한 현상이 신에 의한 것인지 사탄에 의한 것인지 알수 없다면 우리 믿음의 근본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한 상태에서만 우리는 신과 사탄 사이에서 중요하고 의도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 선택은 악마주의(diabolism) 혹은 다른 말로는 사악한 마법(witchcraft)으로 이어질 수 있다. 더욱이, 마녀사냥이 중요한 활동으로 번성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사악한 마법이 진정으로 가능한 분위기에서 뿐이다. 따라서 러시아엔 베리야(역자주: 라브렌티 베리야, Lavrenti Pavlovich Beria, 1899~1953. 스탈린 집권하에 공안 정보기관 NKVD의 수장을 맡았던 정치가. 많은 정치인사 숙청을 담당했으며 스탈린 암살에도 가담했다는 의혹이 있음.)가 있었고, 우리에겐 매카시(역자주: 1908~1957. 1950년 2월 미 국무성이 온통 공산주의 첩자로 가득찼다는 주장을 해서 매카시즘을 불러일으킨 상원의원.)가 있는게 우연이 아닌 것이다.</p>
<p>나는 과학이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언급했다. 이 말은 과학이 의지하고 있는 믿음이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라거나 일상적인 종교적 교리의 도그마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하는게 아니라 자연이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믿음 없이는 과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많은 시연을 통해서도 자연이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아는 한에는, 다음에 올 세상은 <strong>이상한 나라의 엘리스</strong>에 나오는 크로켓 게임과 같은 것이 될수도 있다. 공은 경기장을 떠나 버리는 고슴도치들이고, 후프(hoop)는 경기장의 다른 쪽으로 행군하는 군인들이고, 게임의 규칙은 여왕의 임의의 명령에 따라 그때 그때 바뀐다. 맑시스트 여왕은 제멋대로이고, 파시스트 여왕은 그 좋은 상대방이다.</p>
<p>과학에 있어서 믿음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순전한 인과성의 세상이나 확률이 지배하는 세상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무리 많은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관측들로도 확률이 타당한 개념이라는 것을 증명하진 못한다. 같은 문장을 다르게 표현해보면, 논리학의 귀납법은 귀납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베이컨의 논리학인 귀납 논리학은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그것에 기반해 행동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에 기반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믿음의 확실한 보증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의 솔직함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격언은 그 자체로 믿음에 관한 진술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과학은 사람이 믿음을 가질 자유가 있을때만 번성할 수 있는 삶의 한가지 방식이다. 외부에서 부과된 명령에 따른 믿음은 믿음이 아니며, 그러한 가짜 믿음에 의존하는 공동체는 건강하게 성장하는 과학의 결핍이 불러오는 마비로 인해 궁긍적으로는 스스로를 파멸시키게 되어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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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man Use of Human Beings<br>
11장. 언어, 혼동, 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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