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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1>8장. 지식인과 과학자의 역할</h1>
<p>이 책은 내부 의사소통 채널의 온전함이 사회의 안녕에 필수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 내부 의사소통은 오늘날, 항상 그래왔듯이 위협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만 특별히 심각해진 새로운 문제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들 중 하나는 의사소통의 증가하는 복잡도와 비용이다.</p>
<p>150년전 혹은 50년전만 해도 미국을 포함한 이 세계엔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야길 들어줄 작은 잡지들과 신문들이 넘쳐났다. 지역의 편집장들은 고정된 뉴스기사와 지역의 소문들 뿐만 아니라 지역 및 세계의 사건들에 대한 그의 개인적 의견도 표현할수 있었고 종종 표현하곤 했다. 현재는 자신을 표현할수 있는 이 권리가 신문 및 논문, 출판 서비스의 비용 증가로 인해 매우 비싸져서, 신문 사업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점점 더 적게 말하는 예술이 되가고 있다.</p>
<p>영화는 관객들에게 쇼를 보여주는 비용만 따지면 상당히 저렴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비용은 매우 비싸서 그 영화가 성공할지 미리 알지 못하는 이상 위험을 감수할 만한 영화는 많지 않다. 사업가들의 관심사는 한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재미를 가져다 줄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이 영화를 못받아들이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전국의 극장들에 안정적으로 판매할수 있는지의 문제다.</p>
<p>신문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그리고 심지어 도서 판매에 까지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1인당 의사소통의 양은 엄청나게 많으면서도 전체 의사소통의 양은 유래없이 줄어든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점점더 표준화된 무해하고 시시한 제품을 수용해야 하는데, 이런 제품은 제과점의 흰 빵과 같아서 음식으로의 가치 보다는 보존하거나 팔기에 좋은 특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p>
<p>이것이 근본적으로 현대 의사소통의 외적인 장애물이지만, 안에서부터 갉아먹고 있는 또다른 요인이 함께하고 있다. 이것은 창조성의 협소함과 유약함이라는 암이다.</p>
<p>과거에는, 창조적 예술계로 들어가고 싶은 젊은이는 직접 뛰어들거나 아니면 일반 학교 교육를 통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데, 학교 교육은 어쩌면 그가 최종적으로 하게 될 일과는 무관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의 재능이나 취향을 찾아주는 훈련이었다. 오늘날은 도제제도의 채널이 대부분 막혀있다. 우리의 초등학교 및 중고등학교는 정규적인 학급 교육에 관심을 가지지 무언가를 깊게 파고들어 배우는 지적인 교육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과학이나 문학 과목의 심도있는 준비는 대부분 대학원이나 기타 교육과정으로 밀려나 있다.</p>
<p>한편 헐리우드는 자신의 상품을 규격화함으로써 정극무대에서 볼수 있었던 자연스런 흐름의 연기 재능을 방해해 왔다. 레퍼토리 극장(역자주: 전속 극단을 가지고 몇 개프로그램을 바꿔가며 상연하는 극장)들은 거의 문을 닫았고, 일부는 헐리우드 탤런트팜(talent farms) 이란 형태로 다시 문을 열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고 있다. 우리의 젊은 배우 지망생 대다수는 무대가 아니라 대학의 연기학과에서 연기를 배우고 있다. 우리의 작가들은 젊은 나이에 종합잡지와의 경쟁에서 성공하기 힘들며, 첫번째 시도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그들은 대학에 가서 글쓰는 법을 배우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이와같이 더 높은 학위, 그중에서도 과학적 전문가를 양성하는 정통적인 방법으로 오래전부터 존재해오던 박사학위가 모든 분야에서 지적인 훈련을 위한 모델로 자리를 잡고 있다.</p>
<p>정확히 말하면, 예술가와 작가, 그리고 과학자는 주체할 수 없는 창조의 충동에 의해 움직여서 그들의 작업에 대해 돈을 받지 못하더라도 창조의 기회를 얻기 위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려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형식이 교육의 내용을 대부분 대체해버렸고, 교육의 내용은 유례없이 빈약해지고 있다. 이제 더 높은 학위를 얻고 문화와 관련된 직업을 얻는 것이 깊은 충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위신에 관한 것이 되었다.</p>
<p>시장에 배출되고 있는 이들 대다수의 반쯤 성숙한 도제들의 관점에서보면, 그들에게 작업할 수 있는 그럴듯한 소재를 제공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론적으로는 그들이 스스로 자신만의 소재를 찾아야 하지만, 현대의 고등 교육기관이라는 큰 비지니스는 이와같은 상대적으로 적은 압력으로는 운영될 수 없다. 과거에는 예술이나 과학에서의 창조적인 작업은 학생쪽에서 무언가를 창조하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강한 욕망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박사학위 논문이나 혹은 유사한 도제 수단을 얻으려는 형식적인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p>
<p>내 친구들 중 일부는 심지어 박사학위 논문이 어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대단한 과학적 업적이어야 하고 그의 인생의 대작을 충분히 기술할수 있을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주장하려는건 단지 학위논문이 실제로 그렇게 엄청난 작업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의도에 있어서는 대담한 창조적 작업의 관문은 되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가, 써야할 책과 작곡해야 할 음악이 충분히 남아있는지는 신만이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작업들의 대부분은 십중팔구 꼭 해야만할 설득력있는 이유가 없이 의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젊은이가 쓴 첫 소설이 그가 무언가 말할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소설가가 된다는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의한 것이 되지 않도록 신의 가호가 있기를! 마찬가지로 수학적 논문들이 정확하고 우아하기는 하지만 내용이나 영혼이 없는 논문이 되지 않게 하시길. 그 무엇보다도 특히 이러한 얄팍하고 의례적인 작업이 있을수 있다는걸 인정할 뿐만 아니라 속좁은 오만함으로 활력과 아이디어의 경쟁에 반대를 외치는 속물근성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길!</p>
<p>다르게 표현하자면, 의사소통이 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누군가 의사소통의 사제가 됨으로써 사회적, 지적 명성을 얻기 위해 이루어진다면, 메시지의 품질과 가치는 급락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기계를 루브 골드버그(역자주: 1883~1970. 미국의 만화가이자 발명가. 단순한 작업을 수행하는 복잡한 기계를 그린 만화시리즈로 유명함)의 관점에서 만드는 것과 같은데, 무언가를 동작시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단지 겉보기에 매우 부적합해보이는 도구들로 얼마나 난해한걸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예술에선 새로운 이야기거리와 그걸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는 욕망이 흥미의 원천이자 생명의 원천이다. 이제 우리는 매일같이 이런 미술작품들을 보게 되는데, 예를들면, 평범함과 진부함으로 기울게되는 경향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하기위해, 작가 스스로 추상화의 새로운 규칙들의 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탈출시키고,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새롭고 흥미로운 형식을 사용하기 위해 이 추상화의 규칙들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시해둔다. 모든 예술적 현학자들이 다 학술원 회원인 것은 아니다. 현학적인 전위예술가도 있다. 어떤 학교도 아름다움을 독점하지는 못한다. 아름다움도 질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많은 곳에서 생겨나지만 엔트로피 증가라는 나이아가라(Niagara)에 맞선 지역적이고 한시적인 싸움에서만 존재할 뿐이다.</p>
<p>여기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예술가보다는 과학적인 예술가를 고려할때 좀더 강한 느낌이 드는데, 이것은 내가 무언가 말하고자 처음 선택한 것이 과학이기 때문이다. 나를 자주 화나게 만들고, 항상 실망시키고 슬프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좋은 학교를 선택할때 본질보다는 그 파생물을 보고 선택한다는 것, 새롭고 강력한것 보다는 여러번 복사될 수 있는 관습적이고 얄팍한 것을 선택한다는 것, 통합적인 새로움과 아름다움 보다는 무미건조한 정확함과 제한된 범위와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어디서나 볼수 있는 모습이다. 더욱이 내가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현대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어려움으로 인해 지적인 독창성이 차단된다는 것과,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커뮤니케이션을 자신의 경력으로 선택한 사람들이 종종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독창성의 뿌리에 내리찍힌 도끼와 같다는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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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man Use of Human Beings<br>
8장. 지식인과 과학자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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